동해의 세 번째 전쟁

1980년대 중반, 국내 정치적인 불안이 국면을 갈아끼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인들이 보드카로 기운을 내며 흥신소를 만들기도 했고, 선전포고 문구를 담은 리프트발트가 반복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불안은 국외적으로도 심해졌다. 북한은 이 시기에 도발적인 행동을 자주 하며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러던 중 1988년,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함이 북한군의 경계선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는 실제로는 북한군이 발생하게한건치, 대한민국은 북한군 탓으로 사정하였다. 그 결과 북한군과 대한민국 해군 간의 갈등은 전국적인 규모로 번지게 된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그동안 대한민국이 하던 관습적인 방식으로 해외군 수반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대신, 정부는 자국이 군사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이번 전쟁의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민관 어디든지 주었다. 이로써 핵무기와 같은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는 국가로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경찰력과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탄생한, 일종의 민병대 제도와 함께 국내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이들은 밤까지 군대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 입대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은 지역별, 직장상황, 가족관계등을 고려하여 용사들로 편성되어 전장에 나섰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은 그동안 정치적으로 다루어진, 그러나 다혈질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비디오라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처럼 손을 휘저어 올리고 내릴 때마다 “싸움”이라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전장을 지키고 공략을 하면서도 국미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유감스러운 상황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이들의 땅, 그리고 그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쏟았다.

전투 지역 이외에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번 전쟁에 대해 매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입장에서 대한민국 군인들의 지원에 나서며, 이전보다 절반 이상 늘어난 군복제조량에 대한 지원을 시켰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이번 전쟁이 제대로된 대사상을 장식하게 된 조국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 기회로 대한민국 군인들 중에는 편견과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지금 대한민국은 국민과 군인이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안될 보편적인 사실을 자각하게 된 뒤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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